장마를 빌미로 연락이 닿았고 그 날따라 말이 잘 통했다.
H가 요새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말하자 P는 집에 출장 기념으로 사 뒀지만 아직 따지 않은
벨기에산 와인을 언급했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집에 있다)
‘(하필) 둘 다
평소 와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막차가 끊기기 1시간 전, 굳이 비좁은 P의 원룸에 무려 두 사람이 들어섰다. 실리와 명분이 양학선 체조마냥 균형잡힌 굿 타이밍이다.
낯선 공간 덕에 낯가림이 심해졌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의식한 P는 보디니 디캔팅이니 우스꽝스러운 와인 허세를 부린다. H가 낄낄 웃었다. 이 역시 적절한 타이밍이다.
그때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온다. 지금 창밖을
내다보면 60년 만에 돌아오는 슈퍼문을 볼 수 있단다. 하늘도 나의 편인 나이스 타이밍이다. 살짝쿵 알딸딸한 채로 함께 계단은 올라 옥상에 다다랐다. 평소보다 어깨를 더 가까이한 채 담배를 태웠다. 고개를 돌렸고 거기에
눈이 있었다. 눈과 입을 함께 맞췄다. 그렇게 P와 H는 그날 섹스를 했다.
영화 같은 순간은 영화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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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본격 도시전설 환상 멜로)에 가까운 로맨틱한 하루,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거다. 타이밍이 척척 잘 맞았던, aka. ‘뭘 해도 되는 날’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인생에 그 되는 날이 몇 안 된다는 점이다. 비관적이게도 삶은 ‘안 되는 날’이
훨씬 더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감자탕을 먹지 않았을 텐데, (나한테는
엄청 보들보들하고 편하지만) 면이 헤진 팬티를 고르지 않았을 텐데, 할머니가
보내주신 형광 빛깔(Floral느낌의 컨츄리풍 까실까실이불 님이 생각하는 그거 맞다) 홑겹 여름 이불을 치웠을 텐데, 덜 마른 수건을 굳이 찬장에 넣어두지
않았을 텐데, 콘돔을 한 번에 뜯었어야 했는데, 그런 아쉬움이
밀려오는 순간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지나간 버스에 손을 흔든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한번 잃어버린 타이밍도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
섹스는 타이밍이다.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부터 알게 모르게 켜켜이 쌓인 인상과 감성들로 시작되고 또 마무리되는 게 섹스다. 그래서 우리는 섹스를 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미세먼지나
교통체증이나 신진대사까지는 어떻게 내 맘대로 안되더라도, 적어도 내 집에서만큼은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돼야 성공적인 섹스를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애인과 섹스를 염두에
둔 실내 데이트를 기획하고 있다면, 상대가 섹스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인테리어를 간단히 손봐 두는 것이다.
벽에 크게 걸려 있는 호적메이트(aka오빠누나형언니)의 사진을 보면서 섹스를 꿈꾸는 위인은 드물 것이다. 그 사람의 취향에
맞는 섹시한 노래를 미리 플레이리스트에 선곡해 두는 것도 방법이다. (멜X 인기차트 TOP100은
섹스의 after나 ing이나 before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젤과 콘돔은 미리 베개 뒤에 두 세트 정도를 숨겨둔다. 이제 정말 서로의 우주를 나눠 가지려는 타이밍에 호다닥 서랍으로 달려가는 건 그야말로 갑분싸다. 애인이 오랄 섹스를 해 주는 타이밍에 미리 손을 위로 들어 콘돔을 뜯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것을 자세를 바꾸는 타이밍에 맞춰 스무스하게 끼운다.
물론 필자의 예시들을 모두 더한다 하더라도 정확하고 나이스하며 이견이 없는 ‘섹스 타이밍’을 매 순간 캐치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프로는 매번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적게 하는 사람이다.
“프로세스 줄이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호텔을 가 보면 침실 근처에 모든 용품들이 구비되어 있다. 500년이 넘는 장구한 기간 동안, 유수의 호텔리어들은 이 시공간에
모든 ‘섹스 최적화’를 일궈놓았다. 건조하고 물기 있는 각각의 티슈와 술과 물, 분위기에 딱 맞는 조도를
은은하게 내뿜는 조명이 손에 닿는 위치에 놓여 있으며, 다용도로 사용이 가능한(ㅎㅎ) 높이가 다른 두 베게, 취향을 타지 않는 이불과 디퓨저가 있다.
이것만 해 둬도 반은 간다. 더 멋지고 비싼
가구로 집을 채우란 소리가 아니다. 딱 저만큼 상대와의 섹스를 준비하고 배려하자는 뜻이다.
얄궂은 타이밍의 섹스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래서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오늘도 섹스를 위해 시공간을 지배할
독자들을 위해 섹시한 노래를 하나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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