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다리 건너기
꼬여있는 프레첼
게으른 여우
다리미가 된 남자
”
모 잡지에 열거된 ‘애인을 가장 흥분케 하는 체위 TOP10’을 보면서 인디언 이름이 떠올랐다. 그 뒤로는 아무리 들이켜 봐도 작명 사유가 짐작되지 않는 칵테일 이름들이 떠올랐다.(오르가슴은 아무리 마셔도 오르가슴에 이르지 못하는 이상한 술이다)
마지막으로는 실컷 웃었다. 관계 중 ‘자 이제 우리 꼬여있는 프레첼을 해볼까’, ‘난 다리미가 된 남자가 될거야’라는 말을 실제로 하는 커플을 떠올렸다. 실컷 웃었다. 그리고 허해졌다. (상상 속 커플의 얼굴들에 내 얼굴은 없었기 때문ㅇ…아…아닙니다)

이 체위가 가능한부분인지.jpg
생경한 체위들 33개가
장황하고 디테일하게 열거되었던 본 콘텐츠는 ‘맨날
하는 식상한 섹스에서 탈피해 다양한 체위들을 시도해보세요. 이 중 10개도 못해본 당신은 혹시 구세대?’ 라는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갈무리에 왠지 모르게 맘이 허해졌다. (물론 10개에 못 미쳐서 허한 건 아니다. 33개를 다 해봐서 허한 것도 아니다)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섹스에까지 침범한 것 같아서, 아니 생산적이지 못한 섹스는 섹스가 아니게 된 것 같아서 그게 맘이 허했다.
생산성의 시대
바야흐로생산성의시대다.jpg
평양냉면을
강북에서 먹을까 강남에서 먹을까, 카페에서 책을 볼 건데 어디가 가장 안락하고 좋을까. 그런 고민을 안고 각종 어플과 블로그 후기들을 20분 이상 독파한
뒤 고심 끝에 결정 내린다면(혹은 내리지 못했다면) 당신은
현대인이 맞다. 우리는 모두 ‘생산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일은 생계의 수단이 아닌 정체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고, 게으르고 느린 것은 죄악이 되었다.
이 사조는
게을러도 괜찮았던 많은 것에 영향을 주었다. 느즈막한 것이 정성이자 미학이었던 요리는 15분 컷으로 대표되는 일류 셰프들의 곡예가 되었고, 100명 남짓한
악기가 동원되어야 했던 웅장한 교향곡들은 5개가 채 되지 않는 악기로 구성된 현대음악에 밀려나고 있다. 사실 뭐 괜찮다. 나도 3분 카레를 좋아하며 EDM을
사랑하니까. 현재의 풍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만큼 나는 똑똑하거나 당당하지 않다.
그런데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닿아서는 안되는 곳까지 침투하고 있는 사실에 맘이 아프다. 어디냐고? (말해뭐해) 섹스.
게으르되 여유롭게
확실히 과거에
비해 섹스에 대한 인식은 넓어지고 편해졌다. 전보다 쉬쉬하지 않고 죄악시하지 않는다. 관련된 각종 팁과 보조도구들이 다양하게 소비되고 또 발화된다.
그런데 딱
그만큼 과거보다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다는 것은 감성보다 이성이 먼저라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 섹스를 통해 가장 크게 얻고자 하는 골(goal)은
강렬한 자극이다. 가장 얇은 가장 황홀한, 이런 수식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섹스를 떠올릴 만큼 우리는 ‘생산적’인
잠자리를 원하고 또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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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인가보다. 에너지가 방출된 듯 한 섹스보다 몸 전체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모두에게 충만한 에너지가 차오르는 섹스가 더 좋다. 게으른 섹스가
생산적인 섹스보다 훨씬 더 좋다. 그런 섹스가 가능했던 순간은 현란한 체위들이 속도감 있게 진행됐던
경우가 아닌, 어스름이 내려앉은 오후에 상대의 언저리와 가장자리를 천천히 보듬었던 경우에 더 있었다.
몸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 같은 만족은 눈을 질끈 감고 표정을 구겼던 피스톤 운동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오래 마주보며
체온을 느꼈던 느즈막한 움직임에 있었다.
이름도 실천도
어려울 33가지 체위보다 상대방과 지루하리만치 오래 껴안고 있었던 순간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안정감과
행복을 느꼈다.
섹스는 셈여림이 아닌 나타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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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과 더욱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기 위한 노력은 훌륭하다. 33가지가 아닌 108가지를 배우고 익히려는 모습 또한
멋지다. 그러나 그 노력은 방향이나 자세가 아닌 감성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감성은 느즈막하고
오랜 관찰과 집중을 통해서 발견된다.
음악에 사용되는 용어에는 3가지 분류가 있다. 빠르기와 셈여림을 나타내는 용어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크레센도;crescendo(점점 세게)나 알레그로;allegro(빠르게)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생경한, 그러나 더욱 중요한 분류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나타냄’을 지칭하는 용어다. 돌체;dolce(부드럽고 아름답게), 아마빌레;amabile(사랑스럽게)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나타냄’은 곡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의 섹스는 셈여림이 아닌 나타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주가 아닌 앙상블이 가능할 것이다.
생산성의 강박이 일상의 많은 부분을 침범할지라도, 섹스만큼은 느리고 게으르게 놔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가끔은 화려하고 강렬한 것이 아닌 여유롭고 게으른 섹스가 있길 바란다.
지저귀듯, 노래하듯, 칸타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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